밭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무엇이든 그 현상을 제어하고 방법론을 우선시 하기보다
현상 너머의 본질, 즉 마음 밭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이다.
한동안 내 자신에 대하여 깊은 자조적 태도에 빠진 적이 있었다.
왜 나는 이런 사람이 되지 못할까?
오늘의 나는 왜 이렇게 이야기 하였을까.
그렇게 스스로를 타박하고
또다시 같은 실수 앞에 무너지기를 여러번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처참히 무너지는 날들이었다.
정말 여러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은 하였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의 존재 자체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 때 나의 모습은
그저 당시 나의 마음 밭에서 마땅히 날만한 싹이 돋았을 뿐이었다.
돌무더기와 가시덤불이 가득한 땅
가물어 갈라진 상처가 가득한 땅
그것이 당시 나의 척박한 마음 밭이었다.
그러한 황무지에서 돋아나는 싹은
아주 당연하게도 거친 잡초와 다른 생명을 거두어 가는 억센 가시덤불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가시는 결국 스스로의 마음 조차 찌를 만큼 장성하여 내 마음을 찢어놓았고,
또다시 패인 상처 위에 날이 선 가시나무가 자라기 일수였다.
최근 나는
요 몇 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직 조금 잠든 마음을 말씀으로 일깨운다.
하루의 빈 틈 사이를 흘러가게 두지 않고
무엇이든 의지적으로 살아내려 노력한다.
이 모든 작은 일들을 모아 스스로를 바라보니
어느 새 이름 모를 푸른 싹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아직 남아있는 돌부리와 가시덤불 사이로
생글생글 초록빛 새싹이 돋는다.
참 놀라운 일이다.
어제 나를 일깨운 말씀에는
‘빛은 세상에 존재 할 때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함 같이 자연스례 드러나며, 그렇기에 내가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 보다 그런 빛을 낼 수 있는 자기 내면을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나의 그릇된 태도와 흠 앞에서 좌절하고
억지로 현상을 제어하려 헛된 노력을 반복하다
스스로 무너지기를 그만하고
나의 마음 밭을 성실히 경작하기를 시작해야겠다 다짐했다.
나는 요즘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다.
내가 알던,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지은 세상을 버리고
새롭게 작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렇게 배우는 새로운 세상에서 나를 바라보니
나는 생각보다 더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임과 동시에
생각보다 더 많은 가능성과 좋은 면면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놀랍게도,
오히려 잘났다 여겼던 것들이 가시나무였고
비루하다 묻어두었던 것들이 비옥한 흙이었다.
비루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지탄하고, 낮게 여기는 오만의 가시가
뾰족한 날을 반짝이며 내 턱 밑에 놓여 있었고,
스스로 가진 것 없다 여기며 한탄하던 나의 발 아래로
푸른 새싹이 돋아날 땅이 있었다.
나는 나를 오해했고
오만하며 동시에 자조적이었다.
새로 쓰여가는 세상과 이야기 속에서
나의 목적은 그 어느 때보다 단순하다.
부르심을 믿고 달려가는 것.
평온한 하루를 잃을까 전전긍긍 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마음 밭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 가는 것.
그렇기에 이 이야기에서 나의 목적은
‘현상 유지’가 아닌, ‘더 나은 내일’이다.
하루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이다.
내 마음에 햇살이 들어 푸른 싹을 자라게 할 신호이다.
구름 낀 하늘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함이
작은 초록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그 따뜻한 시선이
나를 황금빛으로 물들인다.